박정훈 칼럼 _ 열심히 살아온 삶이 나의 스펙이다

열심히 살아온 삶이 나의 스펙이다

- 박정훈 조선일보 논설위원


  KT의 김근형(30) 씨는 새내기 티를 채 벗지 못한 신참 사원이다. 작년 7월 입사해 KT 구로영업소에서 통신장비 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매사 적극적이고 활달해 선배들 평가가 좋고 업무 성적도 우수하다. 회사 측은 좋은 인재를 잘 뽑았다고 만족해하고 있다.

  김 씨는 KT처럼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갈 만한 스펙이 못 된다. 집안 사정이 안 좋아 중학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검정고시와 편입을 통해 겨우 대학 졸업장을 땄다. 성적도 그저 그렇고 영어나 외국어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다. 남들처럼 해외연수를 다녀오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직장인 KT 입사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박정훈 칼럼_열여섯에 생활 전선에 뛰어든 김근형 씨

  김 씨는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어렸을 때는 비교적 유복했다. 부모님이 슈퍼마켓과 당구장·목욕탕 등을 운영하면서 크게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고1 때 부모님 사업이 부도가 났다. 집과 모든 재산이 빚쟁이 손에 넘어가고 온 가족이 거리로 나앉게 됐다. 도저히 학교에 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다. 김 씨는 고1 겨울방학 때 자퇴서를 내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열여섯 살 때였다.

  하지만 중졸 학력의 10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벼룩시장을 뒤져 시장통에 있는 분식집 일자리를 구했다. 서빙하고 야채를 다듬고 배달 다니는 일이 창피하고 싫었다. 앞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꿈도, 희망도, 목표도 없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고 시급 2,000원을 받았다.

  성실하게 일하는 그의 모습에 주변 가게 몇 곳에서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다. 인근 스포츠용품점으로 옮겼다. 밤 11시까지 점원으로 일하며 월 100만 원을 벌었다. 걸어서 출퇴근하고 가게에서 주는 밥을 먹으며 월급을 고스란히 모았다. 번 돈은 족족 부모님에게 드렸다.

  보도블록 공사장 아르바이트도 했고, 가스관 매설 인부로도 일했다. 가스관 아르바이트는 위험수당까지 붙어 수입이 짭짤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현장에 나갔다. 밤샘 철야 작업도 마다치 않고 일했다. 다행히 가정형편도 점점 나아졌다. 부모님은 못다 한 학업을 계속하라고 했다.


박정훈 칼럼_주경야독으로 딴 졸업장에 스펙은 꿈 같은 이야기

  3개월간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하고 밤에는 시립 도서관에서 공부해 고교 졸업 자격을 땄다. 청주의 직업훈련학교에 입학했다. 수중의 돈 120만 원에서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내고 났더니 딱 10만 원이 남았다.

  학교 근처 갈빗집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낮에는 수업 듣고 저녁엔 갈빗집에서 서빙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야말로 치열한 나날이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해 무선설비기사 자격증을 따냈다.

  직업훈련학교 졸업 후 군 복무 대신 천안의 방위산업체에 취업했다. 잔업과 주말·야간 근무를 도맡아 했다. 2년 10개월의 복무 기간이 끝나자 주변에선 대학에 가라고 권유했다. 편입 절차가 있다는 것을 그는 그때 처음 알았다. 건국대 공대 편입 과정에 응시했다. 면접 때 그는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을 어필했다. 결국 스물넷 나이에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대학 시절도 주경야독의 연속이었다. 한 학기 다니고 휴학해 돈을 번 뒤 다시 복학하는 식이었다. 아르바이트하며 등록금이며 생활비를 버느라 스펙 만들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28세 되던 해 그는 대학을 졸업했다. 어렵게 손에 쥔 대학 졸업장은 사회 진출에 꼭 필요한 면허증과도 같았다.


박정훈 칼럼_무스펙이었지만 열린 채용에서 자신의 삶을 보여줘 KT에 입사

  여느 청년들처럼 그도 취업에 도전했다. 채용 공고가 나는 기업체마다 응시했다. 써서 보낸 이력서만 400~500개가 넘었다. 하지만 1차 서류전형에서 죄다 떨어졌다. 별 볼 일 없는 스펙의 그에게 채용의 문턱은 너무도 높았다.

  그러나 길이 있었다. 그가 찾아낸 길은 열린 채용이었다. KT의 ‘스타 오디션’ 채용 공고를 보고 눈이 번쩍 떠졌다. 출신 학교와 학점, 영어성적을 보지 않고 면접을 통해 자기 역량을 설명할 기회를 주는 전형이었다.

  그는 5분간의 발표에서 면접관들에게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얘기했다. 좌절하지 않고 얼마나 치열하게 부딪쳐 힘든 환경을 극복해냈는지를 알렸다. 결국, 그는 채용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김 씨는 “나의 절실함이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절실하게 원하면 길이 있더라는 것이다.


박정훈 칼럼_열심히 살아온 삶 자체가 스펙입니다

  김 씨에겐 세상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스펙이 있다, 인생 스토리다. 그는 “열심히 살아온 삶 자체가 나의 스펙”이라고 했다. 열여섯 살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삶이 너무도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의 힘든 경험이 그의 자산이 되었다. 그를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몸만 건강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때 생긴 것 같다”고 김 씨는 말한다.

  흙수저와 약자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과정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 스토리가 된다. 약자의 인생 스토리야말로 약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스펙이다.


박정훈 조선일보 논설위원

* 본 칼럼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전경련의 공식입장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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